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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두와 뒤주


  귀두라는 글자를 타자로 칠 때 뒤주라고 오타가 나지 뒤주는 귀두보다 캄캄하기 때문이지 캄캄한 건 7층과 8층 사이에서 멈춘 엘리베이터, 어둠 속에서 캄캄한 쥐 한 마리 뛰쳐나오지 좁고 구불구불한 복도를 지나 문을 열면 다시 갇힌 뒤주, 귀두를 타자로 칠 때 자꾸 오타가 나지 오타가 난 귀두를 모자 쓴 꽃에게 가져다주지 꽃은 눈을 흘낏거리는 알약들을 한 움큼 건네주지 밤새 저 혼자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 속에서 눈 코 입 없는 얼굴 부풀어 오르지 쥐는 사라지고 엘리베이터에 끼인 옷자락이 이놈들 문 열어라!





나무는 나뭇잎 속으로 걸어들어가고


처음 찍은 발자국이 길이 되는 때
말의 반죽은 말랑말랑 할 것이다
나무는 나뭇잎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쏙독새는 온몸으로 쏙독새일 것이다

  아랫도리를 겨우 가린 여자와 남자가 신석기의 한 화덕에 처음 올려놓았던 말. 발가벗은 말. 얼굴을 가린 말. 빵처럼 향기롭게 부풀어 오른 말. 넘치고 끓어오르는 말. 버캐 앉은 말. 빗살무늬 허공에 암각된 말.

  처음 만난 노을을 허리띠처럼 차고 만 년 전 바람이 만 년 전 숲으로 불어온다 뒤돌아보는 여자의 열린 치맛단 아래 한번도 씻지 않은 말의 비린내 훅 끼쳐온다 여자가 후후 부풀린 불씨가 쏙독새 울음소리에 옮겨 붙는다 화덕 앞에 쪼그린 아이들 뜨겁게 반죽한 새소리를 공깃돌처럼 굴리며 논다 진흙 같은 노을 속에 층층 켜켜 찍히는 손가락 자국들,

귀먹은 아이는 자꾸 흩어지는 소리를 뭉치고 굴린다
깊고 먼 어둠을 길어 올려 둥글게 반죽한다
천 개의 나뭇잎들이 천 개의 귀를 붙잡고
흔드는 소리, 목구멍 속에서 쏙독새 울음소리가
허공을 물고 터져나온다

바람이 석류나무 아래서 거친 숨결을 고르자
처음부터 거기 살고 있는, 아직도 증발하지 않은
침묵의 긁힌 알몸이 보인다
나무는 나뭇잎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쏙독새는 온몸으로 쏙독새인
그 길이 보인다





타이타닉이라는 방주


  어머니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아버지가 담배 연기로 불어 만든 나, 물이 새고 있었다. 구름도넛을 수백 개 씩 만들어내는 아버지와 제 날개를 뜯어먹는 새들, 장난감 말이 허공을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기울고 있는 거대한 방주 안이었다. 바다에서는 물을 닮은 것들이 살아남듯 방주 속에서는 기울어진 것들만이 살아남았다. 음악이 맨 먼저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식탁에 놓인 과일접시가 세계의 갑판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나는 오렌지주스처럼 흘러내렸다. 과육같이 달고 물컹한 하늘,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 날이었다. 누군가 촛불을 켜들고 멀고도 가까운 소리로 아직 세상에 없는 내 이름을 불렀다.





동물사전


-슬픔

언젠가 이 동물을 잡아
자루에 넣은 사람이 있었다
집에 돌아오는 동안 자루는 점점 가벼워지고
나중엔 흠뻑 젖은 빈 자루만 남겨 놓았지
그때부터 너는 잡을 수 없는 동물
사냥총을 내려놓고 숨을 돌리면
세상에서 가장 가느다란 휘파람새 소리로
옆에 와 앉는다

-빛

봄날은
가장 눈부신 곳부터 썩어 들어간다
벚꽃나무 가지에 끓고 있는 구더기들
밥알같이 말간 몸뚱이가
빗물에도 바람에도 떨어지지 않는다
살을 모두 파먹고
흰 뼈가 보일 때 까지
나무를 떠나지 않는다

-그늘

아파트 마당에 꽃나무 그늘이
빨간 자동차를 삼키고 있다
번호판이 붙어 있는 꽁무니 까지 남김없이 삼키느라
벌린 입을 연신 씰룩거린다
만개한 4월 꽃나무 그늘은 독액이 가장 왕성한 種,
촉수를 환하게 펼쳐놓고 먹잇감을 기다린다
오늘은 연하고 아삭한 자동차가 꼼짝없이 붙들렸다
오전 내내 삼키고 남은 形骸를
봄볕 속에 툭 뱉어 놓는다





외계손증후군*


  오렌지 주스를 사려는데 왼손이 생리대를 훔쳐 핸드백에 넣네 삐이-삐 경고음이 울리는 바코드 판독기 앞에서 정말이지 내가 그런 게 아니란 말이에요 왼손은 어느새 핸드백 속 오버나잇-위스퍼를 꺼내 포장을 찢네 이 팔은 에이리언이야 앞가슴의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하네 오른손이 멈출 수 없는 왼손이 길거리에서, 스물네 알의 알약을 한 컵의 꿈과 함께 삼키세요 내용을 읽을 수 없는 알약들을 입 안 가득 쏟아 붓네 전화를 기다리는 오른손과 전화를 받지 않는 왼손이 휠체어를 타고 네 목을 조를 거야 한 손이 죽으면 다른 한 손이 검은 모자를 쓰고 장례식에 와 줄지도, 가지마다 다른 꽃을 뱉어내는 꽃나무 한 그루

* 뇌의 이상으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왼손과 오른손이 다르게 행동하는 것, 한 손은 다른 손을 통제할 수 없다고 한다.


조혜정



 








Rene Aub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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